사랑하고 싶지만, 마냥 사랑하기만 할 수 없는
나에 대해 썼습니다.
읽으시면서 쓴 사람을 편협하다고 생각하고
약간은 혐오를 느끼길 바랍니다.
읽는 분 중 일부는 나도 이 정도 운은 타고났는데?
또는 내가 더 럭키맨인 것 같은데?
하면서 으스대다가 가책을 느끼길 바랍니다.
어떤 한 사람을 직업만으로 규정하며
납작하게 보는 걸 비판하면서도
나에게도 그런 면이 보이는 게
싫어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엘리트주의를 욕하면서도
어떤 특출난 사람이 나타나
힘든 나를 구원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게 있고,
때로는 내가 그 리더일 순 없을까
열망하는 마음도 있다는 걸 느끼는
복잡한 감정도 들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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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깜짝 놀랄 만한 얘기를 들려주마
아마 절대로 기쁘게 듣지 못할 거다
뭐냐 하면..
별일 없이 산다 中
by 장기하와 얼굴들
나는 요즘 아침에 눈꺼풀을 열고 베개에서 뒤통수를 들어 올릴 때 마다 행복하다. 정신 승리 중인 건지, 갓생이 난무하는 헬조선에서 가능한 얘기인지 물으신다면.
니가 들으면 십중팔구 불쾌해질 얘기를 들려주마
오늘 밤 절대로 두 다리 쭉 뻗고 잠들진 못할 거다
그게 뭐냐면..
별일 없이 산다 中
by 장기하와 얼굴들
쌉가능. 나니까 쌉파서블. 남들과 다르게 나는 운이 좋으니까 완전 가능하다. 나는 사는 게 재밌다. 하루하루 즐거웁다. 매일매일 아주 그냥 신난다.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덩실덩실 신바람이 난다. 퇴근하는 게 아쉬워 눈물겨울 지경이다. 일요일 밤 주말이 저무는 게 아쉬워서 침대에 누워 눈이 시뻘개질 때까지 유튜브나 보고 있는 당신과 나는 다르다. 운 말고 다른 비법이 있냐고 물으신다면.
이번 건 니가 절대로 믿고 싶지가 않을 거다
그것만은 사실이 아니길 엄청 바랄거다
하지만..
별일 없이 산다 中
by 장기하와 얼굴들
나는 운이 그냥 좋지 않고 조홀라게 좋다. 그게 비법이다. 운칠기삼이라는 말은 다 거짓부렁이다. 운구땡구구기공이 더 옳은 표현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곤 0.001의 재주를 갈고닦아 겨우 0.01로 확률을 높이는 것뿐이다. 부럽고 억울하다면 너도 운을 가져라.
지금부터 약간은 뻔한 얘길 할 건데, 내가 얼마나 운이 좋냐면 나는 아프리카 대륙 어느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그것도 무려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다행히 두 분 모두 살아계시고 경제활동도 아직 무리 없으셔서 용돈을 안 드려도 된다. 주변엔 잘난 체하지 않는 예의범절을 잘 배운 친절한 명문대 척척석박사들이 넘쳐나서 대충 일해도 옆에서 알아서 다 수습해준다. 난 줍줍만 하면 된다. 그래서 첫 직장 이후로 이력서를 써 본 적이 없다.
대학에 입학할 때는 화학공학을 전공하려고 했었다. 너무 한가지 전공만 올인하나 싶어 딱 한군데 컴퓨터 공학과를 썼다. 닷컴 버블이 꺼진 후 회생할 조짐이 안 보이던 때라 비인기학과였는데 그냥 괜히 끌려서 입학까지 해버렸다. 요즘엔 의대보다도 들어가기 어려운 학과라는 과장 뉴스도 등장했다. 억을 주고도 개발자를 못 모셔가서 안달이란다. 아무도 모를 때 들어간 회사는 유니콘이 되어서 동기들의 부러움을 샀다. 여자인 건 좀 운이 부족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동양인 + 여성 + 엔지니어면 소수자 프리미엄으로 요즘 그렇게 까다롭다는 미국 비자 받기가 쉽단다.
더 큰 운은 여기 있다. 첫 직장으로 두 회사를 고민하다가 설탕을 파는 기업으로 갔는데, 선택하지 않았던 회사 Daum은 반년 후 카카오를 인수했다. 친정회사 설탕 가게는 매해 긴축정책을 발표하고 자금난에 허덕이다가 투 썸 플레이스를 매각했다. 반면 내가 버린 Daum은 카카오님이 되어서 보란 듯이 날마다 고공행진이다. 역시 천 원짜리 설탕 파는 회사는 배포가 너무 작다며 대륙으로 가야겠다고 입사한 30명짜리 중국에 한국 화장품을 파는 스타트업은 입사 1년 후 코인회사로 바뀌었다가 대표님이 토큰을 자의로 몰래 추가 발행해서 망했다. 퇴사 후 홈페이지에 내 얼굴이 아직 남아있어서 무서운 아저씨들이 협박하러 올 것 같으니 제발 제 얼굴 좀 내려달라고 부탁하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가장 최근에는 글로벌 유니콘에서 아직 사업 아이템도 안 정한 두 명짜리 회사에 덜컥 합류해서 세 명짜리 회사가 됐다. 대체 뭐에 홀렸는지 나도 잘 모른다. 심지어 당분간 코드를 쓸 일도 없다. 커리어 관리니, 전문성이니 하는 게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느낌이다. 내 의사결정이란 대체로 이 모양 이 꼴이다. 이게 왜 더 큰 운이냐 물으신다면.
내가 가진 최고의 운은 적당히 똑똑하고 적당히 멍청함에 있다. 그리고 주변에 비슷하게 멍청한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더 많이 똑똑하면 더 좋지 않냐고? 여러분은 살면서 너무 똑똑해서 괴로운 친구들을 여럿 봤다. 스스로 괴롭지 않다면 주변이라도 괴롭게 하는 지나치게 똑똑했던 친구들 말이다.
똑똑함이란 생각만으로 도달할 수 있는 곳이 남들보다 더 많고 멀다는 의미로 결국 더 많은 걸 보게 해준다. 우리 같은 멍청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들은 더 빠른 속도로 더 많이 흡수한다. 때로는 지나치게. 그래서 더 이상적이고, 비판적이고, 논쟁적이기 쉽다. 멍청한 여러분도 살아보니 좋은 날보다 나쁜 날이 더 많고, 한없이 좋은 것에도 나쁜 티가 꼭 묻어있지 않던가. 그게 더 선명히 보인다고 생각해보라. 게다가 온 세상에 다 나보다 멍청한 놈들뿐이라 말도 안 통하고 머저리 같은 소리나 찍찍해대는 꼴을 평생 보며 산다고 상상하면 정말이지 우웩이다. 그리하여 멘사 회원 3,700여 명을 대상으로 벌인 실험을 실은 어느 논문은 똑똑한 사람이 보통 사람보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질 가능성이 20% 더 높고, ADHD를 가질 가능성이 80% 더 높고, 기분 장애를 겪을 가능성이 182% 더 높다는 결론을 냈다. 행복하기 어려운 조건이다.
멍청해서 나쁜 점이야 설명이 필요 없다. 그럼 멍청해서 좋은 건 대체 뭘까?
멍청함은 무모함을 동반한다. 뭘 모르니 첨벙첨벙 잘도 뛰어든다. 고심해서 헤아리고 깊이 생각해서 신중하게 결정하는 것의 결여. 가히 똑똑함을 등지고 있는 설명이다. 대신 무모함은 기회를 몰고 온다. 이를테면 고심해서 헤아리고 깊이 생각해서 신중하게 결정하는 사람은 로또를 사면 안 된다. 그러니까 멍청한 사람이 로또를 사서 30억짜리 돈벼락을 맞는다. 멍청한 사람은 꾀도 없다. 그래서 고심해서 헤아리고 깊이 생각해서 신중하게 결정하는 사람은 효율이 안 나올 게 눈에 선해 하지 않을 일을 멍청한 사람은 계속한다. 똑똑한 사람은 대동여지도를 만들지 못한다.
적당한 멍청함과 적당한 똑똑함이 하모니를 이루면 이런 그림이 가능해진다. 멍청해서 무모하게 뛰어든 일을 적당한 똑똑함이 수습한다. 그럼 멍청함이 준 로또도 건지고 똑똑함으로 30억을 날리지 않고 불려 다른 로또를 사는 데 쓰는 시나리오가 가능해진다. 대동여지도를 만들어 뿌듯하게 집안 액자로만 걸지 않고, 지도 안밖의 모두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궁리를 하게 한다. 이 적당한 이라는 단어가 정말 어려운 경지라는 걸 여러분은 알 거다. 세상 많은 요리책이 설탕과 소금과 간장을 적당히 넣으면 맛있는 음식이 된다고 하지만 우리는 같은 재료로 지옥에서 온 음식을 만든다. 주변을 돌아봐서 알겠지만 이렇게 적당히 멍청하고 적당히 똑똑하기란 정말이지 어렵다. 조금만 더 똑똑해도 냉소적이기 쉽고, 조금만 더 멍청해도 일을 수습하지 못하니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죽지도 않고, 적당히 주변과 신선하고도 어리석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칼 맞지 않고 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적당한가.
(금요일 밤이 마감일이었던 글쓰기 모임에 제출했던 글입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돈을 내고 금요일 밤에 술은 고사하고 머릿속에 먹물이나 잔뜩 넣고 글을 뽑아내고 있는 걸 보면 여러분도 적당히 멍청하고 적당히 똑똑할 가능성이 높다. 세상에 어떤 사람들은 아주 조금 더 똑똑하고, 아주 조금 더 멍청해서 겪는 어려움이 많다. 그리고 운은 말 그대로 운인지라 똑똑과 멍청의 농도를 조절하기란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다.
가끔이라도 행복하다면 그건 당신이 운이 좋아서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이따금 은은하게 웃는 게 이 운 때문임을 진심으로 안다면, 그 운을 자신을 위해서만 쓰는 것은 너무 아깝다. 재미도 없다.
내가 이토록 운이 넘치는 사람임을 깨닫고, 넘치는 운을 어떻게 주변에 나누어 분산 투자할까 고민하며 사는 게 내가 해야 할 전부라고 생각하니 눈 뜨는 게 행복하다. 이래도 정말 내 말이 배가 아픕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