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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언젠가 친구인가 지인인가 어른인가가 물은 적 있다.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생각해?”
나는 당시 없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렇게 말하는 게 좀 더 도덕적이고 착해 보이고 멋있어 보여서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질문을 던졌던 사람은 귀천이 있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사람 말을 듣고 보니 그도 맞는 말 같아서 그 후로 직업에 귀천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로 결심했다.
지난 달 마음이 바뀌었다. 일에는 귀천이 없다. 많은 사람의 삶에 좋은 영향력을 널리 펼칠 수 있다면 그 크기만큼 귀한 것으로 생각했다. 누군가의 삶을 곁눈질로 볼 때 우리는 귀하고 천함을 쉽게 평가내릴 수 있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에 감히 값을 매길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삶이 구체적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가치나 수준을 함부로 논하기 어렵다. 사탕 파는 아낙의 일이 귀한가 아닌가는 금방 판단할 수 있지만 선자의 생이 귀한지 천한지 묻는다면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풍요로운 지금, 우리는 누군가의 먹고사는 걱정을 업신여긴다. 무엇이든 해낼 기회가 도처에 널린 현대에서 더 큰 꿈과 더 높은 이상을 가지지 못한 것에 쉽게 손가락질한다. 어떻게든 먹고 살기 위해 남의 집이며 건물을 쓸고 닦고, 음식과 물건을 닥치는 대로 실어 나르는 이의 하루를 폄하한다. 지금의 어려움을 잠깐 견디고 곰곰이 생각하여 전략을 잘 짜면 궂은일을 않을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한 결단력과 의지를 깎아내린다. 선자는 아픈 가장을 대신해 가정을 일으켜야 했고, 아주버님의 체면을 지켜주었어야 했으며, 형님은 고운 사람이었고, 아이들을 돌볼 사람이 필요했다. 어떤 사람은 약간의 배려와 약간의 무시와 충만한 사명감으로 아주 작은 한 발을 무겁게 뗀다.
누구의 삶에나 고통과 부침이 있지만 어떤 사람은 남들보다 좀 더 평탄한 길을 걷기도 한다. 지나온 길이 깨끗한 사람은 마음의 걸림이 적어 용기의 폭이 크다. 내가 큰 용기를 쉽게 냈기 때문에 남도 마찬가지로 같은 의사결정을 비슷한 마음가짐으로 할 거라고 오해하곤 한다. 그리고 그 고통을 감내하지 못한 사람을 겁쟁이나 의지가 부족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곤 한다. 한 사람의 결정은 그 사람의 배경과 생의 총체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것 자체로 숭고하다. 용기로 가득 찬 나의 한 발과 보폭의 차이가 크다고 해서 낮은 수준이 아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구체적으로 바라볼 기회가 적기 때문에 높고 낮음을 편하게 논하기 쉬운 입장에 놓인다. 심지어 가족의 삶조차도 말이다. 잊기 쉽기 때문에 평가하고자 하는 마음이 치고 올라올 때마다 억지로라도 자주 상기해야 한다. 남 얘기가 아니라 나에게 하는 말이다. 허허.
어제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았다. 타르라는 지휘자의 전성기와 전락을 그린 영화를 봤다. 위플래쉬가 일부 겹쳤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함께 본 친구와 예술과 성장과 가학성의 관계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고통스러워야만 성장하는 건 아니다. 즐거운 마음에는 성장하고자 하는 욕구가 없다고 착각하기 쉽다. 즐거운 마음에는 스트레스가 없다고 오해하기 쉽다. 즐거운 마음에도 더 잘하고 싶고, 한계를 뛰어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두려움보다 즐거움의 동력이 더 길다고 생각한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지만 계속 더 고통을 감내하라고 다그치는 것은 위험하다. 고통이 가득한 삶 속에 간간이 즐거운 마음을 심어주는 일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