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먹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의 시대에, 우리는 어쩌면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버거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통제를 달가워하는 건 아니라 자유로워 보이는 것을 선호한다. “오늘 점심 뭐 먹을까?” 는 무례한 질문이고, “한/중/일 중에 먹고 싶은 거 있어?” 는 센스 있는 출발이다. 완벽한 자유는 우리를 막막하게 만든다. 그래서 좋은 시스템을 갖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다. 시스템이 만들어 준 경계 안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는 자유의 상징이다. 우리는 원하는 무엇이든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에서 구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다. TV 방송 관계자나 언론 기자가 마이크를 주어야만 가질 수 있었던 발언권을 모두가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평생 도록 여러 업적을 쌓아도 생길까 말까 한 권위를, 주목받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적은 노력으로 채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랜선을 통해 얻은 자유 시스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스크롤을 계속해서 내리는 것, 그러다 문득 멈춰 서서 하트를 누르는 것뿐이다. (이 글도 하트를 받기위해 쓰였다.) 이 덕분에 우리는 시스템에 통제받으면서 자유로운 것 같은 기분을 누린다.
사람의 시야각은 좌우 120도로 한 눈에 걸리는 것이 지나치게 많지만, 인터넷 세계 안에서는 정면만 잘 주시하면 고개를 돌리는 것보다 더 많은 소식과 정보가 얻어걸린다. 굳이 뒤통수 너머를 보기 위해 도리도리를 하고, 걷고, 뛸 이유가 없다. 전방 주시가 미덕인 인터넷 세상에서 우리는 주변을 둘러볼 여력이 없다. 지극히 개인화된 공간에서 살필 것은 나의 상태와 기분, 안위뿐인데, 이것만으로도 매일 매일을 보내기에 충분한 자극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찍은 사진과 그 아래 적힌 단어, 표현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그것이 내 기분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끝없이 살핀다. 오로지 나와만 관계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느껴도 되는 자유를 만끽한다. 간혹 창문이 없는 협소 주택에 살고 있는 답답함을 느끼지만, 남의 비위를 맞출 필요는 없기 때문에 그럭저럭 감당할 만한 답답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위를 둘러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고개를 돌려 사방에 펼쳐진 자연과, 사람과, 사물을 보라는 말인지도 모른다. 전방 주시가 나에게 주는 감정이 갑갑함이라면, 주변을 둘러볼 때 오는 것은 막막함이다. 전방 주시에 쓰는 시간이 점점 늘어난다는 것은, 더 많은 사람이 스크린을 거쳐 세상을 이해하는 걸 편안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더 힘들어하는 감정은 갑갑함 보다는 막막함이라는 말일 수도 있다.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보는 것보다 당장 내 눈 앞에 다가온 것 중 구미에 당기는 것을 쥐고 산다.
연희동 산책을 팀과 함께 만들어 나가면서 내가 자주 느끼는 감정은 막막함이다. 벅찬 만큼 아찔하게 아득하다. 광활한 지구별 위에 한 점의 티끌이 되어 서서 어디에 시선을 고정해야 할지, 그곳으로 기어가야 하는지, 굴러가는 게 좋을지 고민하고 있자면 내가 가진 자유의 크기만큼 외롭다. 하지만 아크릴 상자에 갇힌 답답한 생쥐는 옆 놈을 이유 없이 물어뜯지만, 야생 동물은 넓은 초원을 모두 쓰며 뒹굴고 뛴다는 걸 우리는 안다. 그러다 가끔 힘을 합해 사냥도 하고, 물도 마시고, 놀멍 쉬멍 하는 모습을 동물의 왕국에서 봤었다. (동물의 왕국.. 제발 안다고 해주세요.) 쪼들리고 치열한 그 모습이 얼마나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는 지도 우리는 봤다. 어차피 한 점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해방감을 준다. 큰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