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을 상상하니 그것참 희망차군. 나는 한층 현명해져 있을 것이고 그때는 많은 것을 내려놓고 주변에 가진 것을 베풀면서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겸허히 기다릴 거야. 그땐 그것 나름의 재미가 있겠지. 껄껄.
라고 자신의 노년을 상상한다면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죽음보다 더 두려운 단어가 있다면 노년이 아닐까요? 나날이 약해져 가는 몸을 가누기 위해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하고, 예전의 나와 달라진 나를 마주하며 깊은 이질감에 시달리다가 그로 인해 무력해지고, 오래도록 외로움과 고립에 시달리며 죽음을 기다리는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길고 긴 쇠퇴기. 노년.
소설가 필립 로스는 평범한 한 남자의 노년기와 죽음을 다룬 그의 책 <에브리맨>에서 말했습니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
그도 그럴 게 왕년에 잘 나가던 광고 회사 아트디렉터였던 그는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열정적으로 함께 섹스를 즐길 파트너를 찾습니다. 세 번의 결혼과 이혼을 할 정도로 사랑에 있어서는 재주꾼이지만 세월은 역시 무색해서 이제는 연애가 잘되지 않고, 자식들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형제는 의지가 되기는 커녕 경쟁심만 부추기고, 뜻대로 잘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로 상처 입은 마음은 요양사의 돌봄으로도 해결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 어른이 되기까지 19년이 걸리듯이 2023년 대한민국 기준으로 만 65세에 노년기에 접어든 노인이 84세에 죽기까지 또다시 꼬박 19년이 필요합니다. 노년이 달갑지 않다는 건, 나날이 높아져 가는 스위스행 편도 티켓 검색량이 알려주죠. 안타깝게도 기대수명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점점 늘어나 기대 노년기도 쑥쑥 길어지고 있습니다.
노년은 낯섭니다. 인간이 지금의 나를 해석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춘기를 떠올리면 쉽습니다. 12살이 된 소년과 소녀는 지난 10년을 회고하며 내가 누구인지 탐구하는 시기를 짧게는 1년, 길게는 10대 전반에 걸쳐 보내죠. 살아보셔서 아시겠지만, 사춘기는 한 번만 오지 않습니다. 10대 때 인식한 자아는 한동안 쓸모를 다 하다가 또 다른 계기를 만나면 다시 열병을 앓습니다. 그렇게 다시 자아를 재정립하고 또 그게 나인 줄 알고 지내다가 다시 벽을 만나고, 다시 나를 수정하고를 평생 반복하는 것입니다.
노년이 생소한 이유는 그동안의 자아 인식이 자립에 기반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의존의 테마를 가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반드시 얼마 전까지 아주 능숙하고 편하게 하던 일들을 못 하게 될 거예요. 그것이 당신이 삶을 살아가는 데 여전히 필요한 것들이라면 사람이든 기계의 도움을 받아야 하겠죠. 그렇습니다.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주변에 폐 끼치고는 절대 못 산다고 말하는 당신일수록 지금부터 도움을 주고받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 좋습니다. 신체만큼 마음도 약해진 그때 너무 많은 것들을 수정하려면 자기 존엄의 위기가 올 수 있으니까요.
노년은 외롭습니다. 가치관의 공유 같은 고차원적인 수준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자식들은 각자의 삶을 꾸려가느라 바쁠 것이고, 태어나보니 가족이었던 당신을 생각하는 시간보다 스스로 만든 가족을 돌보는데 더 많은 시간을 쓸 것입니다. 만일 자식들이 당신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어서 괜찮다면 자식은 불행해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여성이라면 배우자는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혼하지 않았다면 이 역시 같은 조건이네요. 같은 추억을 공유하던 친구들도 어떤 사유로 이사를 하거나 아프거나 죽어버려서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절망적으로 보이는 이 고립의 상황은 흥미롭게도 행복한 시나리오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나가떨어지고 없는 상황에 당신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고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입니다.
노년은 지루합니다. 당신은 자주 무료하고 심심할 것입니다. 곁에 남은 사람들이 파격적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에, 친구가 많더라도 충분히 누릴 만큼 체력과 재정적인 사정이 넉넉지 않기 때문에, 치열하게 살아온 지난날들로 인해 이제는 더 이상 호기심이 남아있지 않아서 허무할 것입니다. 따분함에 못 이겨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려고 할 때마다 ‘이제 와 이거 해서 뭐에 쓰나.’라는 생각이 울컥울컥 올라올 것입니다. 낯선 것을 받아들이는 데 쓰게 될 에너지와 돈, 주변의 시선 같은 것들을 신경 쓰다가 ‘에구 몰라. 귀찮아.’라는 말로 이 모든 감정들을 일축하겠죠.
그 밖에도 나의 입장을 대변하고 옹호해줄 사람도 시스템도 희소해지면서 소외되었다고 느낄 겁니다. 신호등은 너무 빨리 깜빡이고, 이 세상 모든 좋은 곳에는 젊은 사람들만 득실거려서 내가 설 자리가 없어졌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살면서 어렵게 쌓아온 노하우를 현대는 필요 없다고 말할 것이고, 차곡차곡 축적한 나만의 기막힌 가치관들을 알리려고 하면 할수록 요즘 것들은 꼰대 같은 소리라고 할 것입니다. 이승에 존재하는 모든 부정적인 단어를 그러모으면 노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노년은 슬픕니다.
저주처럼 들리는 이 사실들을 나열한 것은 당신을 절망케 하려는 노력이 아닙니다. 노년을 맞이했다면 어떤 우여곡절을 겪었든 그날까지 살아있다는 것이니 행운입니다. 혹시 제가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일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된다면 위에 열거한 것들은 저에게도 닥칠 미래이니까요. 어느 누가 자기 자신에게 저주를 퍼붓고 싶겠어요.
노년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과 나이 듦을 두려워하게 하는 마음이 생기는 건 당신 탓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사회 탓이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기대수명은 65세가 되지 않았으니까요. 지금의 우리가 노년이라고 말하는 기준에 도달하기도 전에 이미 인간은 죽고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20년 가까운 세월을 노인으로 보내게 될 거라는걸 대비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듣기만 해도 우울해지는 위의 우중충한 단어들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서서히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것들입니다. 희망차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은은하게 행복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행복이 다섯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신체의 건강 2) 친밀한 관계 3) 환경과 경제적 안정 4) 적당한 루틴 5)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을 거라는 또는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
몸이 고장 나서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대사를 읊습니다. 저는 이 대사를 외우는 게 의사 자격시험에 포함되어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스트레스 때문이니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신선하고 균형 잡힌 식단을 유지하고, 충분히 쉬세요.”
벌써 스트레스받네요. 초기 기획보다 오래 쓰게 된 인간의 몸을 노력해서 관리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이 모든 것들을 나의 굳은 의지만으로 해낼 수 있다는 건 착각입니다. 이것들을 의지만으로 직접 해내려면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들어요. 해보셔서 알잖아요. 어렵고 힘들게 모은 돈을 엄한 곳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고 건강한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돕는 데 써야 합니다.
건강의 정의를 조금 바꾸고도 싶습니다. 수전 웬델은 장애 학을 다룬 자신의 책 <거부당한 몸>에 이렇게 썼습니다.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 대부분의 노인은 장애인이다.
전 세계 장애 인구는 15%입니다. 100명 중 15명이 장애인이니 ‘건강하지 않은 상태’까지 폭을 넓히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아무 탈이 없고 튼튼한 상태는 환상이지 평범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신체가 불편한 상태로도 누릴 수 있는 것과, 갈 수 있는 곳,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다행히 인식의 개선은 조금씩 일어나고 있고 이것들을 해소하는 데 기술이 쓰여야 합니다. 사람이 도왔던 일들을 기계가 대체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우리는 기계 앞에서는 수치심을 덜 느끼니까 마음이 긁히는 일이 줄어들 겁니다.
친구에 관한 정의를 조금 넓히면 어떨까요? 사람들은 아주 친밀한 관계에서만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착각을 하곤 합니다. 마음에 짐이 될까 봐 가족에게 차마 말못하는 비밀들이 있지 않나요? 친구의 사정들이 속속들이 상상되어 공유하지 못하는 사정들이 있지 않나요?
폐부를 다 열어 보여야만 친구가 되는 건 아닙니다. 느슨하게 연결된 사이라 더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낯선 사람들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덕에 무거운 이야기도 가볍게 들어주곤 합니다. 이렇게 가뿐하게 웃고 떠들고 나면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들이 산뜻하게 풀리기도 합니다. 저는 이것을 마음의 환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마음의 환기는 얕은 관계일 때 더 자주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얕은 관계라고 해서 친밀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친밀함의 결이 다른 것뿐입니다.
가족이 친구를 대신할 순 없어요. 꽤 많은 종류의 외로움이 친구와 해소해야 할 것들을 가족에게 기대할 때 일어난다는 걸 우리는 기억해야 해요.
느슨한 연대를 만들고 일상에 활력을 주는 데 취미만 한 것이 없습니다. 취미의 사전적 정의는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입니다. 놀랍게도 공부도 취미의 한 종류입니다. 전문성을 위한 공부와 취미로서의 공부는 다른 영역입니다. 꼭 한 가지를 꾸준히 하지 않아도 됩니다. 재밌으면 장땡입니다. 그러니까 취미지요.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재밌자고 돈과 시간을 쓰는 게 사치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여가를 즐겨보지 않은 분들이 하는 말입니다. 취미를 제대로 즐겨본 분들은 아실 거예요. 일상에 차오르는 묘한 활력과 기대감, 그림과 음악 같은 곳에 몰입했을 때 오는 자유로움과 해소감, 어디에도 쓸모없는 것들이지만 조금씩 실력이 쌓이면서 높아지는 자존감 같은 것들을요. 이런 것들이 쌓여야 쓸모 있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즐기는 것에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나중에 하려면 어색해서 시도하기 어렵고 만사가 귀찮아져요.
혹시 우리가 가난하고 우울하다면 그것은 치열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여유가 없어서일 수 있습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한 조사에 따르면 “당신이 어느 정도 생활 수준을 영위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에 “이 정도면 좋은 수준”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2.7%뿐이었습니다. 97.3%가 스스로 잘 산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유. 느긋하고 차분하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마음의 상태. 또는 대범하고 너그럽게 일을 처리하는 마음의 상태. 너무 치열한 삶은 시야와 마음을 좁게 만듭니다. 살면서 가끔 만나는 품도 돈도 넉넉해서 당신도 편안하고 나도 편하게 해주는 어른들은 이미 다 갖추어서 여유로워진 것이 아니라 여유를 연습해 온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는 노인이 아닙니다. 이렇게 여러 문장으로 노년을 쓰고도, 노년이 어떤지 모릅니다. 그저 상상만 해볼 뿐입니다. 상상도 잘 되지 않아서 이 글을 쓰기 위해 6권의 책과 3편의 영화가 필요했습니다.
노년을 상상하기 어려운 건 당연합니다. 어른을 만날 기회가 없습니다. 제가 다니는 카페, 음식점, 책방, 체육시설에는 어른들이 안오십니다. 콘텐츠가 돈이 된다고 말하는 요즘 세상에 나이 든 어른을 조명하는 콘텐츠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글은 완전히 틀렸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틀렸을 수 있는 이 상상을 누군가는 해야합니다.
모두가 맞이할 노년인데 마치 없는 것처럼 구는 세상에 가끔 화가 납니다. 조금이라도 더 젊음을 연장할 방법만 공유되는 게 이따금 이상하기도 합니다. 그 방법이라는 게 대부분은 외양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갖은 노력으로 젊어 보이는 모습을 아주 조금 더 유지하더라도 우리는 결국 나이 듭니다. 그 때 필요한 것들은 따로 있습니다. 젊음이 사라졌을 때도 우리를 지켜줄 것들을 연습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의 힘이 조금 빠졌을 때도 우리에게 은은한 행복을 줄 것들을 차곡차곡 쌓아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노년을 준비할 자격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