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나를 꾸준히 괴롭혀온 컴플렉스가 있다. 나는 창의적이지 못하다. 내 안에서는 남들처럼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질 않는다. 내가 내는 아이디어는 매번 식상하고, 유통기한이 임박한 유제품 같다. 그래서 센드버드에서 사내 이벤트로 진행했던 강점 진단 결과가 그렇게나 반갑고 위안이 되었다.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강점 중 리서치 전문 기관인 갤럽이 선정한 34개의 강점 가운데 나의 상위 5개 강점에 Ideation이 있었던 것. 나를 괴롭혀오던 구속복에서 해방된 기분이었다.
그것도 잠시, 강점 진단을 한 지 3개월 만에 다시 나는 창의성의 벽에 부딪혔다. 역시 나에게 새로운 발상 같은 건 없었다. 연희동 산책의 확고한 비전/미션에 반해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것들을 시도해 볼 수 있을지는 추상적인 단계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질 못하고 있었다. 그 때 <아티스트 웨이>를 추천받았다. 어쩐지 감상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은 이 책을 전혀 그렇지 않은 지인이 추천해줘서 더욱 믿음이 갔다.
이 책은 결국 듣기에 관한 격려이다. 방어기제 없이 진심으로 깊이 듣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찾고 싶은 것을 손에 쥘 수 있다는 선언이다. 일어나자마자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을 솔직하게 듣고, 주변에 지나는 풍경과 소리를 천천히 귀담아 느끼고, 내 앞에 앉아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본인조차도 정확한 의도를 모르는 채 하는 말을 모조리 이해해 볼 기세로 경청하는 것. 조 코헤인의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면>에 따르면 듣기는 일반적으로 수동적 행위로 여겨지지만 사실 경청하며 좋은 질문을 하면 말하는 이가 스스로에 대해 몰랐던 것을 발견하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해주는 매우 능동적인 환대의 행위라고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상대방의 말뿐만 아니라 자기 생각도 발전시킬 수 있다. 내 안에 있는 것만으로는 고갈된 자원을 남으로부터 빌려올 수 있다.
창업을 결심하기 주변에 많은 조언을 구하러 다녔다. 그동안은 내면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무얼 고민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건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내가 뭘 고민하고 있는지 네가 대신 찾아달라며 주변 사람들에게 떼를 쓰고 다녔다.
조언을 구하러 다니다 보면 본인 얘기 해 주느라 정신이 없어서 내가 궁금했던 것과 거리가 멀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조언을 할 때에도 비슷하다. 물론 그것 자체로도 도움이 될 때가 많다. 하지만 이번 기회로 어쩌면 많이 듣고 많이 물어봐 주는 것 자체로 조언이 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나의 지인들은 내가 풀고 싶은 문제를 나보다 더 풀어주고 싶어 했고, 그래서 나 자신도 스스로에게 던져본 적 없는 질문들을 많이 해주었다. 좋은 질문들 덕분에 ‘내가 고민하는 이유는, 내가 별로 능력이 없는 사람인 걸 직면하게 될까 봐 두려워서였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내 역량을 최대치로 써보고 싶어서 달려들었는데 잘 안됐을 때, 실패하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결국 나의 상냥하고 다정한 지인들이 해준 건 어떤 말을 나에게 보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걸 끌어내 준 것이다.
더 많이 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경청하고 싶다. 나를 감싼 우주가 각자의 최대치를 이끌어 낼 수 있도록. 그 안에서 나도 그 영향을 자연스레 흡수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