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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에서, 골든브릿지를 건너며 당신에게

이곳 날씨는 내내 좋습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날씨의 요정이잖아요. 인지하지 않아도 기분에 영향을 미치는 게 날씨이니 날씨의 요정으로 태어난 건 좀 더 긍정적이기 쉬운 조건을 타고난 거라 행운이지요.
어떤 도시와 나라의 색깔을 만드는데 가로수와 공원에 심어진 나무들이 큰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엔 가로수로 벚나무와 플라타너스, 은행나무가 많이 쓰이죠. 공원엔 소나무와 단풍나무, 동백, 목련이 자주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는 그 나무들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신 이름 모르는 나무들이 드리워져 있어요. 어느 책 표지에서 보았던 잔가지가 혈관처럼 많고 잎은 드문 나무도 쉽게 보입니다. 바오밥 나무를 축소한 듯 겉보기에도 밀도가 높은 단단한 나무도 있었어요. 언젠가 가구에 무척 붉은 나무가 쓰인 걸 보고 염료인가 의심했었는데, 노스비치 인근의 매리타임 공원에서 그처럼 붉은 나무기둥을 봤습니다. 자연에 이토록 다양한 색채가 점묘되어 있다는 데 놀랍니다. 그 붉은 나무의 가지가 해변을 향해 뻗은 곡선이 까치발을 들고 선 발레리나의 몸 같아 혼자서 아라베스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제가 좀 싱거운 사람이잖아요.
많이 걸었습니다. 하루에 2만 보 정도를 걷고 있어요. 낯선 환경은 눈에 밟히는 게 많으니 발바닥이 하는 투정에 덜 귀 기울이게 만드나 봐요. 긴 보행에도 지루하지도, 피곤하지도 않아요. 아. 거짓말이에요. 이 도시는 언덕이 많고 가파릅니다. 시티 라이츠 서점에서 롬바드 가로 걸어 오르는 길에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어야만 했습니다. 언덕의 경사만큼 제 호흡도 거칠어졌어요. 구불구불한 일방통행 길 끝에서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내려다봤을 땐 소매가 없는 셔츠만 몸에 남아있었습니다.
당신에게 시티 라이츠 서점을 꼭 알려주고 싶어요. 1953년에 시인 로렌스 펄링게티에 의해 만들어진 이 서점은 독립출판을 시작한 지 어느덧 70년을 향해 갑니다. 시인에 의해 탄생한 서점이니만큼 2층에 시집만을 위한 공간을 내어주었습니다. 간격을 두고 각기 다른 모퉁이에 3개의 나무 의자가 놓여있는데 이곳에 앉아서 낡은 책 비린내를 맡았습니다. 문학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킬 권리를 선물해준 서점이라고 해요. 그래서인지 LGBT와 여성학, 사회학 등의 섹션이 따로 나누어져 있었어요. 이곳에서 성 평등 교육을 하는 친구를 위해 여성학 책꽂이에서 내용도 모르는 책 한 권을 챙겨 나왔습니다.
개가 어느 곳에서 등장해도 어색하지 않아 부럽습니다. 카페에 들어와 개와 나란히 카운터 앞에 서서 커피를 주문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식당에서도 쇼핑센터 안에서도, 길가 어디든 개가 손님도 주인도 아닌 그저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 개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재밌는 경험을 했어요. 지나는 골든 레트리버의 씰룩이는 엉덩이에 넋을 잃고 있다가 소매치기 현장을 목격했어요. 그 앞에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가, 바닥에는 STOP 사인이 그려져 있었는데 사람이 우선인 곳이라 소매치기가 도망갈 수 있도록 차가 배려해주었습니다. 이런 걸 두고 아이러니라는 단어를 쓰나요? 범죄도 잦고 사건 사고가 많은 도시이지만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세계의 다양한 인종과 동물이 함께 모여 사는 규칙을 마련하고, 지키고, 고쳐나가려는 모습을 보며 선진국이 맞구나 실감합니다.
실은 오늘 카스트로 극장에서 작은 영화 한 편을 보고 싶었습니다. 아쉽게도 제 일정 중에는 다른 이벤트로 상영을 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인근 거리에 멋들어진 벽화도 드물지 않게 보이고 시쳇말로 힙하다고 해서 어깨가 기울었는데 이번 여정에서는 연이 닿지 않나 봅니다. 언젠가 저 대신 와주세요. 그때 제가 함께라면 더 좋고요. 나이가 드니 좋은 점도 있습니다. 아쉬운 것들을 놓고 와도 그 여운이 마냥 쓰지만은 않아요.
골든 브릿지에 왔습니다. 안개가 가리는 날이 잦아 온전한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던데 날씨의 요정은 오늘도 행운을 맞았습니다. 지금 이 편지도 골든 브릿지를 도보로 건너며 쓰고 있어요. 겨우 3일 있었을 뿐인데 말이 많았어요. 오늘 그곳에서 당신은 어떤 하루를 보냈나요. 당신 소식이 궁금하네요. 또 연락할게요.